여러분은 올림픽 개막식을 보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으신가요? "우리는 하나다"라는 메시지가 전 세계를 관통하는 그 순간,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화합의 장면이 펼쳐집니다. 2021년 도쿄 올림픽 개막식에서 존 레논의 'Imagine'이 울려 퍼질 때,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이 위대한 축제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오늘은 모든 올림픽의 시작이자 근대 올림픽의 첫 발걸음이었던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잊혀졌던 전통, 다시 태어나다
"스포츠는 국가 간 평화의 다리를 놓는다" - 피에르 드 쿠베르탱
올림픽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원전 776년부터 기원후 393년까지 약 1,200년간 그리스의 올림피아에서 개최되었던 고대 올림픽은 당시 그리스 도시국가들 사이의 전쟁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화합을 도모하는 신성한 행사였습니다. 로마 제국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교도 축제로 간주하여 금지령을 내리기 전까지 말이죠.
그리고 그로부터 약 1,500년이 지난 19세기 말, 한 프랑스 귀족이 이 고대의 전통을 현대에 부활시키겠다는 대담한 꿈을 품었습니다. 바로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의 창립자인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입니다. 그는 스포츠가 국가 간 우호를 증진하고 젊은이들의 교육과 인격 형성에 기여한다고 믿었습니다.
1894년 6월, 파리에서 열린 국제 스포츠 회의에서 쿠베르탱의 제안으로 근대 올림픽 부활이 결정되었고, 첫 개최지로는 고대 올림픽의 고향인 그리스 아테네가 선정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스포츠 행사의 재개가 아닌, 고대와 근대를 잇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피어난 근대 올림픽의 첫 꽃
첫 근대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당시 그리스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고, 아테네 올림픽 개최를 위한 자금 마련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초기에 그리스 정부는 자금 부족을 이유로 개최를 포기하려 했지만, 그리스의 부유한 사업가 게오르기오스 아베로프가 대규모 기부를 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습니다. 그는 아테네 파나시나이코 경기장 복원을 위해 당시 돈으로 약 92만 드라크마(현재 가치로 약 300만 달러 이상)를 기부했습니다. 또한 그리스 왕실과 시민들의 기부도 이어져 마침내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파나시나이코 경기장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였습니다. 기원전 330년경에 건설된 이 경기장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체육 경기가 열렸던 곳으로, 근대 올림픽을 위해 대리석으로 완전히 복원되었습니다. 이 경기장은 지금도 아테네에 그대로 남아있어 근대 올림픽의 시작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14개국 241명이 만든 역사적인 순간
1896년 4월 6일, 부활절 월요일. 그리스 국왕 게오르기오스 1세의 선언과 함께 마침내 제1회 아테네 올림픽이 막을 올렸습니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국제적인 행사로, 14개국에서 241명의 선수들이 참가했습니다. 오늘날 10,000명이 넘는 선수들이 참가하는 현대 올림픽과 비교하면 소규모였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국제 행사였습니다.
참가국은 호주,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칠레, 덴마크, 프랑스, 독일, 영국, 그리스, 헝가리, 이탈리아, 스웨덴, 스위스, 미국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일제 강점기 이전이었지만, 당시 국제 정세와 스포츠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올림픽에 처음 참가한 것은 그로부터 52년 후인 1948년 런던 올림픽이었죠.
제1회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육상, 체조, 펜싱, 사이클, 레슬링, 역도, 사격, 수영, 테니스 등 9개 종목에서 43개의 세부 경기가 치러졌습니다. 지금의 300개가 넘는 세부 종목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숫자지만, 이것이 근대 올림픽의 첫 발걸음이었습니다.
첫 올림픽의 영웅들과 잊혀진 이야기들
제1회 아테네 올림픽에는 오늘날과 달리 금, 은, 동메달 시스템이 없었습니다. 1위는 은메달과 올리브 가지, 2위는 구리 메달과 월계수 가지를 받았으며, 3위에게는 메달이 수여되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금, 은, 동메달 시스템이 공식적으로 도입된 것은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부터였습니다.
이 대회의 최고 스타는 단연 독일의 체조 선수 카를 슈만이었습니다. 그는 체조에서만 두 개의 금메달을 획득했고, 레슬링에서도 우승하여 한 대회에서 3개의 금메달을 따낸 첫 올림픽 선수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육상 선수 제임스 코널리는 근대 올림픽 최초의 금메달리스트라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그는 세단뛰기에서 우승하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죠.
그러나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는 마라톤에서 나왔습니다. 당시 마라톤은 고대 그리스의 전설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종목으로, 마라톤 마을에서 아테네까지 약 40km를 달리는 경기였습니다. 그리스의 스피리돈 루이스는 직업 군인이자 평범한 물 배달부였지만, 이 경기에서 2시간 58분 50초의 기록으로 우승하며 그리스 국민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가 경기장에 들어섰을 때, 7만 명의 관중은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고, 그리스 왕자들이 직접 결승선까지 동행했다고 합니다. 루이스의 우승은 개최국 그리스에게 큰 자부심을 안겨주었고, 그의 이름은 오늘날까지 그리스에서 전설로 남아있습니다.
아테네 올림픽이 남긴 유산
제1회 아테네 올림픽은 10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4월 15일 폐막했습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대회는 근대 올림픽의 기초를 다지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대회의 성공으로 4년마다 다른 도시에서 올림픽을 개최하는 전통이 확립되었습니다. 올림픽의 상징인 오륜기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지만(1920년 안트베르펜 올림픽에서 처음 사용), 국제 스포츠 대회의 기본 형식이 이때 마련되었습니다.
또한 이 대회는 스포츠를 통한 국제 교류와 평화의 중요성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쿠베르탱이 꿈꾸었던 "스포츠를 통한 국제 평화와 젊은이들의 교육"이라는 이상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참가하지 못했던 우리나라도 이후 올림픽을 통해 큰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첫 참가한 이후, 우리나라는 꾸준히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스포츠 강국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특히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우리나라도 올림픽 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
125년, 그리고 미래를 향해
1896년 아테네에서 시작된 근대 올림픽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으로 인한 취소(1916년, 1940년, 1944년)와 2020년 코로나19로 인한 연기 등 여러 위기를 겪으면서도 125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인류의 축제로 이어져 왔습니다.
아테네 올림픽 당시 14개국 241명이었던 참가 규모는 2021년 도쿄 올림픽에서는 206개국 11,000여 명으로 확대되었고, 경기 종목도 9개에서 33개로 늘어났습니다. 그만큼 올림픽은 전 세계인이 함께하는 진정한 글로벌 축제로 성장했습니다.
기술의 발전으로 올림픽은 이제 전 세계 수십억 명이 동시에 시청하는 메가 이벤트가 되었습니다. 1896년 아테네 올림픽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죠. 하지만 올림픽의 본질적 가치 - 평화, 우정, 존중, 탁월함 - 은 변함없이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올림픽을 통해 느끼는 감동과 열정은 125년 전 아테네에서 시작된 작은 불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불꽃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전 세계를 밝히며, 국경과 인종을 넘어 하나 된 인류의 모습을 보여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단순한 참가국이 아닌, 올림픽 강국으로서 세계 스포츠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올림픽을 통해 우리의 위상을 높이고, 세계와 소통하는 기회를 만들어나가길 바랍니다.
다음 올림픽에서는 또 어떤 감동의 스토리가 만들어질지, 어떤 새로운 역사가 쓰일지 기대되지 않나요? 우리 모두 인류 최고의 축제, 올림픽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는 증인이 되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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