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탐험/역사적 그날

1978년 4월 20일: 냉전 하늘 위의 비극, KAL 902편 격추 사건

참새의 방앗간 2025. 4. 20. 05:50
728x90

  

1978년 4월 20일, 프랑스 파리 오를리 공항에서 이륙한 대한항공 902편이 소련 영공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비행기는 알래스카 앵커리지를 경유해 서울 김포국제공항으로 향할 예정이었으나, 항법장치 이상으로 인해 계획된 경로에서 크게 벗어나 소련 영공으로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냉전 시대 동서 갈등의 위험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비극적 사례였습니다.

 

사고의 경위

비행의 시작과 항로 이탈

대한항공 902편은 보잉 707-330B 기종으로, 김창규(46세) 기장을 비롯해 차순도 부기장, 이근식 항공기관사가 조종석에 있었습니다. 총 109명(승객 97명, 승무원 12명)이 탑승했습니다.

비행기는 북극 근처를 지나가던 중 치명적인 항법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보잉 707 여객기에는 관성항법장치가 장착되어 있지 않았고, 자기 나침반과 실제 경로의 차이를 계산할 때 편각의 부호를 잘못 파악하여 크게 우회전했습니다. 이로 인해 비행기는 계획된 경로에서 벗어나 바렌츠해 상공을 통과하여 소련 영공으로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소련 방공 시스템의 대응

소련 방공 레이더는 20시 54분에 소련 영해에서 약 400km 떨어진 지점에서 비행기를 포착했고, 21시 19분에 비행기가 소련 영공에 진입했습니다. 소련 방공군은 이 미확인 기체에 25분간 무전으로 접촉을 시도했으나 별다른 반응 없이 그대로 영공을 넘어오자 21시 11분에 Su-15 요격기를 긴급 발진시켰습니다.

알렉산드르 보소프 대위가 조종하는 Su-15 요격기가 대한항공 902편에 접근했습니다. 보소프는 처음에 이 비행기를 미국 공군의 정찰기 RC-135로 잘못 식별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접근한 후 대한항공 로고인 날개를 펼친 붉은 황새를 볼 수 있었습니다.

격추와 비상착륙

소련과 대한항공 측의 설명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소련 측은 대한항공 902편이 요격기의 지시를 따르라는 명령을 무시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김창규 기장은 보소프의 Su-15TM을 발견하고 기체 외부의 항법등을 모두 켜고 속도를 줄여서 지시를 따르겠다는 신호를 보냈으며, 국제 공용 비상주파수 121.5MHz로 계속 접촉을 시도했으나 Su-15TM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다가 갑자기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증언했습니다.

21시 42분, 보소프는 2발의 R-60 미사일을 발사했습니다. 첫 번째 미사일은 빗나갔고, 두 번째 미사일이 왼쪽 날개 끝을 맞춰 4m 가량이 떨어져나가고 파편에 의해 동체에 구멍이 다수 생겼습니다. 이 공격으로 한국인 승객 방태황이 현장에서 즉사했고, 일본인 승객 스가노 요시타카(31)는 불시착 후 소련군의 구조 중에 과다출혈로 사망했습니다. 이외에도 13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피격 직후 동체에 생긴 구멍으로 인해 객실 감압 경보가 울리자 김창규 기장은 즉시 기수를 내리고 급강하하여 고도를 35,000피트(10,668m)에서 5,000피트(1,524m)로 낮췄습니다. 이때 소련군의 방공 레이더에서도 사라지고 구름을 뚫고 강하하면서 보소프의 시야에서도 사라졌습니다.

이후 아나톨리 케레포프 대위와 알렉산드르 겐베르그 소령이 조종하는 Su-15TM 요격기들이 대한항공 902편을 발견하고 아프리칸다 군공항으로 유도하던 중, 얼어붙은 코르피야르비 호수를 발견하고 그곳에 착륙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김창규 기장은 모든 악조건을 뚫고 비상착륙에 성공했습니다. 승객을 가득 태워 무거운 대형 여객기로, 미사일에 맞아 한쪽 날개 끝이 잘린 상태에서, 마찰력이 거의 없는 얼음호수 위에, 그것도 야간에 비상착륙을 시도하여 성공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생존자 구조와 사후 처리

소련군은 비행기에 올라 승객들의 여권을 걷은 뒤 3대의 대형 헬리콥터를 동원해 켐이라는 지역의 군사도시로 부상자, 여자, 아이들부터 이동시켰습니다. 생존자들은 따뜻한 장교 클럽에 남녀로 나누어 재우고 식사를 제공받았습니다.

4월 22일, 조종사와 항법사를 제외한 생존자들은 무르만스크에서 핀란드 헬싱키-반타 공항으로 팬 아메리칸 항공편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대한항공 항공기가 4월 23일 생존자들과 사망자들의 시신을 싣고 서울로 출발했습니다.

4월 29일, 대한항공 902편의 조종사와 항법사가 석방되었습니다. 소련 공식 통신사 타스(TASS)는 그들이 소련 영공 침범과 요격 항공기의 착륙 명령 무시를 인정했다고 밝혔습니다. 소련은 승객 보호에 대한 비용으로 한국에 10만 달러를 청구했지만, 한국은 이 청구서를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신문내용

 

사건의 의미와 교훈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은 냉전 시대 동서 갈등의 위험성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입니다. 단순한 항법 오류가 국제적 위기로 확대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민간인들이 정치적 긴장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일깨웠습니다.

이 사건은 또한 1983년 9월 1일 발생한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의 전조가 되었습니다. 007편 사건에서는 269명의 승객과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두 사건 모두 냉전 시대 소련의 엄격한 영공 방어 정책과 동서 간 불신의 결과였습니다.

대한항공 902편 사건은 국제 항공 안전 규정과 위기 상황에서의 의사소통 프로토콜 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항법 시스템의 한계와 극지방 비행의 특수한 도전에 대한 인식을 높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국제 관계에서 대화와 협력의 중요성, 그리고 민간인의 안전이 정치적 갈등보다 우선시되어야 함을 다시 한번 상기합니다. 대한항공 902편 사건은 47년이 지난 지금도 국제 항공 안전과 위기 관리의 중요한 사례 연구로 남아 있습니다.

 

728x90